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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경고

글쓴이 : 헤이워드새소망침례교회 날짜 : 2020-01-04 (토) 06:12 조회 : 376

옥한흠 목사님의 "눈물의 경고" 설교 발췌본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은퇴 직후 교회에서 '눈물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신 내용을 발췌해 올립니다. 이 설교를 통해 현대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눈물의 경고 / 빌립보서 3:17-21 

 

제가 원로목사로서 가끔 이 강단에 설 기회가 앞으로도 있을 텐데 가끔 서는 사람이니까 될 수 있으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평안해지고 도 받고 격려도 받고 또 여러분 나름대로 힘을 얻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 사실 저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이 제목을 보셔도 알고, 성경본문을 보셔도 알겠지만 내용이 좀 무겁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를 긴장시키는 내용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할 수 있으면 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성령께서 계속 강권적으로 저를 떠밀었습니다. 그래서 ‘아, 이건 주님의 명령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이 말씀을 들고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들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역사를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으셨다던 지 공부를 하시면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분이 대충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대부분이 알고 계십니다. 그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250년 전의 인물입니다. 미국 건국의 정신적기초가 된 청교도신학을 대변하는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요, 또 저술가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어났던 성령운동, 대각성 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린스턴 대학교 초창기의 총장을 지내셨던 분이고, 그리고 그가 졸업한 예일 대학에서는 그의 모든 설교와 그의 모든 저술을 총 집대성해서 30권이 넘는 전집을 출간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이만한 분량의 전집을 내는 것은 거의 예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독보적입니다. 

그가 코네티컷 주의 제일 큰 노스삼톤 교회라는데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23년 열심히 목회를 하고 난 다음 40대 후반에 그 교회에서 갑자기 쫓겨났어요. 

그렇게 위대한 인물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까 굉장히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를 교회에 더 모시고 일을 하도록 할 것이냐 아니면 교회를 떠나게 만들 것이냐는 신임투표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 투표에 참여 할 수 있는 사람이 남자들뿐이었습니다. 남자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어요. 230명의 세례교인이 모여서 투표를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지지하는 표는 23표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전부 다 ‘떠나십시요’ 이렇게 싸인을 한것입니다. 

왜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많은 교인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다는 의구심을 가졌어요. 저 사람의 믿음이 진짜 믿음일까 의심이 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는거에요. 물론 그들은 신앙고백 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고 물으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정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합니다. 또 사회에서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 목사님이 볼 때 참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혼돈이 되는 거에요. 요즘 사스환자가 생기면 정확하게 사스에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를 알지 못할 때는 의심환자로 분류해서 격리시키지 않아요? 에드워즈 목사님도 자기 교인들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의심성도로 분류를 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냐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뭔가 들어나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별로 표가 안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예수 믿으니까 틀림없이 구원받습니다 하고 교회가 확신을 시켜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는 판단을 했습니다. 잘못하면 그들의 영혼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는 드디어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찬을 한 달에 한 번 이상씩 자주 했습니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을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 목사님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강화시켜서 아무나 함부로 참석하지 못하도록 선을 그었어요.  

신앙고백 잘 한다는 것 가지고는 안돼요.  

정말로 예수님을 알고 나서 크고 괄목할 만한 지속적인 변화를 체험한 사람만이 되요. 속사람이 정말로 변화된 사람이냐?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가 얼마나 무섭고 저주받을 죄인인가를 통감하면서 회개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냐? 그리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 사실 때문에 무릎 꿇고 감격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냐? 이런 것을 따졌어요. 

그런 내적인 변화와 체험이 있으면 성찬에 참여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참석못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교인들이 반발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2,3년 갈등을 하고 씨름을 하다가 결국 그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어떻게 보면 에드워즈 목사님이 그들의 신앙을 의심한 것이 타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당시 청교도 신학을 따르는 교회들 중에서는 이 구원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대교회같으면 우리 어떻게 합니까? 

자매님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복음을 제시합니다. 전도폭발나가서도 마찬가지죠?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나서 

‘형제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원자 되심을 믿겠습니까?’ 

‘예, 믿어보죠’. 그러면 

‘저의 기도를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예, 따라하죠.’ 

그렇게 기도를 따라하고 ‘아멘’하고 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자, 축하합니다. 당신은 예수 믿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영원한 영생을 선물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에드워즈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구원을 쉽게 파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을 죄인이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슴 뜨겁게 절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 구원 받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라고 어떻게 함부로 하느냐 이 말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고 말씀도 읽으면서 내가 구원받기를 사모하고 씨름해야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는 말씀처럼 정말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전심을 다하는 자가 구원받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를 열심히 다녀요. 설교를 열심히 들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어서 진리를 깨닫는 눈이 열리게 하시고 그렇게 깨닫고 보니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이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 앞에 달려가서 주님을 붙들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해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체험적인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원받는 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경지가 있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자연스럽게 안 믿을 수가 없는 믿음을 갖게 되는 의지가 있어야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평생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씨름을 할 수 있다고 그들은 보았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공감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도 보면 지나친 도식이라고 지나친 어떤 프로세스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 보세요. 대각성 전도집회에 나와서 30분 설교 듣고 나서 예수 믿겠다고 작정했는데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지 진짜가 아닌지는 두고 봐야죠, 그러나 10년, 2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에 더 깊이 젖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한 두 명입니까? 

그러니까 꼭 그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씨름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에 저는 동의안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말로 평생동안 씨름해서 겨우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그런 사람이 계실 지도 몰라요. 아직도 교회는 나오지만 솔직히 에드워즈 말한 것처럼 크고 괄목할만한 지속적인 변화가 그 내면에 일어나는 체험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거에요.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 안하는데요. 그러나 제가 한 가지 공감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너무 쉽게 이야기 하면 엉터리 신자가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편이 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가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설교의 제목이 이런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들”, 듣기만 해도 으쓱한 제목이죠? 

이 설교는 영문학적인 가치 때문에 미국고등학교의 교과서에 거의 다 실려 있습니다. 물론 전부가 실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 설교를 할 때에는 자기 교회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 교회에 강사로 초빙되어 가서 저녁에 설교를 했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교를 읽는 사람입니다. 원고를 읽는데만 90분 이상이 걸려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들” 그는 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여러분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것보다 더 오늘 이 자리를 앉아계시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더 진노하시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그래놓고 이런 설교를 했어요. 

‘하나님의 진노가 불타고 있습니다. 지옥의 불길은 지금 무섭게 타오르며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들 위에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는 그들 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밤에 지옥으로 가지 아니한 것, 당신이 지난밤에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것, 당신이 아침에 일어난 후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앉은 후 그의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는 죄악되고 사악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을 거두시면 떨어지는 바윗돌을 거미줄이 멈추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여러분은 즉시 굴러 떨어져 지옥의 밑없는 구덩이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촛불을 켜놓고 90분 동안 이 설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성령의 강하신 역사가 일어났어요.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비명을 지르고 떼굴떼굴 구르고,,, 

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 거에요. 내가 교회는 다녔지만 지금까지 엉터리다 엉터리, 엉터리로 믿었다, 그것이 가슴에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니까 견디지를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 까무러지는 사람, 거꾸러지는 사람,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 유명한 대각성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이런 설교를 어디서 들어보겠습니까? 또,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교회를 누가 가겠습니까? 진짜 오늘날 이런 설교가 필요한데 감히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도 없구요, 이런 설교를 듣고 싶어 하는 성도도 없구요,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목사가 자기 교회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도 비참한 일이지만 목사로부터 자기 믿음을 의심받고 있는 교인들도 비참하기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그런 일이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좋은 사례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 내용의 말씀을 펴놓고 있습니다. 

우리 18절 19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듣기만 해도 읽기만 해도 가슴이 오싹해지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빌립보 교인들이었는지 아니면 일반적인, 잘못 믿는 사람들을 놓고 하는 것인지는 선명하지 않지만 내용의 분위기를 보아서는 빌립보교인들을 염두에 놓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이 여기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회생활을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놓고 근심하고,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하느냐? 그 이유가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와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현대성경 번역에는 우리에게 좀 더 마음에 와 닿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은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중에 이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아니 예수를 그런대로 믿고 새벽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고 다락방에도 나간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몇 사람이 되겠느냐? 우리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다 겉으로 보아가지고는 그 사람을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아요?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2천 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목사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있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바울은 너무 안타까워서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망한다고 경고하면서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아요. 듣지 않고 있으니까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솟았어요. 그래서 지금 이 편지도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결국 멸망이요,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바울이 말을 했을까요?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꼭 한 번 나오는 말입니다. 

왜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을까요? ‘그들의 신이 배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죠? 이 말을 거꾸로 하면 그들의 배가 신이다, 하나님이다, 감이 오지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앞세운 단 말이에요,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 자기를 더 위합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 자기에게 있어요. 그래서 자기의 뜻과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거에요. 자기가 중심이에요.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자기 배는 신이다, 자기 신은 배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믿는다면 이럴 수가 없죠.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주님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 모두의 인생목적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해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요, 예수님이 왜 죽으셨느냐,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았어요. 내가 인생의 목적이에요. 정말로 내 배가 내 신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우리가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나를 하나님처럼 대접할 수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요. 이제는 내가 삶의 중심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에요. 신앙생활 잘하려고 하는 목적도 나 개인의 무엇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가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이런 변화를 맛본 사람에게 자기 배가 신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이 그대로 살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결국은 멸망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까?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부끄러운 것들이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되는 줄 알고 그것 가지고 으시대고 산다는 이야기죠, 다시 말해서 이생의 자랑을 앞세운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늘 자기 훈장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있지 않아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나와서 은근히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자랑합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자기가 성공한 것을 가지고 목에 힘을 줍니다. 그리고 남보다 인물 좋은 것 가지고, 명예를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자식이 요란한 것 가지고 은근히 자랑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결국은 뭐냐?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 짓이에요. 

이것은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너무 어울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왜? 야고보고서 4장 4절에 이런 세상적인 것과 벗된 사람, 이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좋아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원수과 되는 일들을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그대로 따를 수가 없지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었는데요. 믿습니까? 여러분? 믿으면 가치관이 바뀝니다. 가치관이 바뀌어요. 

만약 성공했다고 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그러면 온 천하에 요란을 떨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해요.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해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성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세요. 나의 성공을 원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성취하기를 원하십니까? 가르쳐 주세요. 그러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나와요. 

내가 생각 밖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몇 억있습니다. 몇 백억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주님 앞에 부들부들 떨어요. 주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줄 아시면서 왜 이렇게 재물을 주십니까? 가르쳐 주세요.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으면 제게 보여 주세요. 제가 바르게 쓰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구요.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남에게 칭찬을 많이 들어요. 자랄 때는 뭐같이 자랐는데 나중에 커보니까 대단한 놈들이 되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자식을 가지고 요란을 떨고 자랑할거 없어요. 하나님 이 귀한 자녀들을 우리 가정에 주셨는데 잘 키워야 되겠어요. 어떻게 키우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인물 잘났어요? 제가 잘났나요? 잘나게 낳아줬으니까 잘 난거지.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렇게 인물이 잘 났는데 잘 났다고 다들 하는데 내가 어떤 일을 해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 우리의 자세란 말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대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내가 자랑할 것은 다른데 있어요.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자랑해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값없이 주신 하늘의 놀라운 축복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자랑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놓고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영광을 놓고 자랑하는 거예요. 아, 전부 다 십자가를 위해서 쏟아진 그 놀라운 축복들을 자랑하지, 땅에 있는 것 가지고 자랑안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의 것을 가지고 으시대고 자랑한다면 그 사람을 놓고 십자가의 원수라고 해서 잘못될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냐구요? 주님이 물으십니다. 

--- 중략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가운데는 십자가의 원수가 한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한사람도 없어야 됩니다.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야 됩니다. 그 영광을 부끄러움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 됩니다. 땅의 것과 골똘하고, 몰두하는 사람이 없어야 됩니다. 

‘오! 성령이시여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내면을 깊이 꿰뚫어 보시고 우리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쳐 주셔서 참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스런 백성이 되도록 나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우리 모두가 속으로 간절히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십자가의 원수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인플레이션 현상입니다. 인플레가 뭔지 아시잖아요. 돈을 자꾸 많이 찍어내면 돈의 가치가 없어져서 인플레가 되잖아요. 교회서 구원을 너무 손쉽게 얘기하는 거에요. 

‘당신 예수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 그러면 당신 구원 받았군요.’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정말로 에드워즈 목사님처럼 입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그 내면에 진정한 변화가 있는 사람인가를 체크를 하지 않아요. 정말로 과거의 죄를 주님 앞에 다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정확하게 점검하지를 않아요. 

그저 입으로 예수 믿는다고 하고 교회만 다니면 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인줄 알고, 당신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당신 믿음이 그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하고 억지로 구원의 확신까지 강요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은혜를 너무 쉽게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신앙이 좋고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 그 가운데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스스로를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금 사랑의 교회에 와서 본다면 어떻게 볼까요? 바울이 이 교회에 와서 본다면 어떻게 볼까요? 예수님이 이 교회에서 와서 우리 모두를 보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날보고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제가 정말 제대로 되먹은 목사라면 사랑의 교회 이런 성도가 몇 사람만 있어도 바울처럼 울꺼에요. 이런 설교를 울면서 할꺼에요. 가슴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할 꺼에요. 

그러나 저에게는 눈물이 없어요. 그만큼 저 자신도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비록 눈물을 흘리고 이런 설교를 바울처럼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왕 예수 믿는 이상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듣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서는 믿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 가운데서 나하고는 관계없어 하는 교만한 생각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런가 하면 믿음 좋고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소문난 고린도교회에서도 주님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쉽게 말하면 네가 진짜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인가 점검 한 번 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잘 믿는 사람에게도 성경은 이렇게 가끔가끔 경고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잘 믿던 잘 못 믿던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 중요한 말씀이에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알아두어야 합니다. 날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고 천국이야기하고 영생이야기하고 예수 믿으십시오 하는 사람이 겉으로 늘 생각이 땅의 것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천해지는 거에요. 세상 것을 자랑한다 정말 유치한 거에요. 항상 자기만 생각한다. 정말 정말 처절한 모습이에요. 

우리 그래선 안돼요. 여러분 우리가 항상 조용한 시간만 생기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에게로 내 마음이 달려갑니다. 생각이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날을 그려보는 거에요. 그리고 그 날에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하는 거에요. 

가만히 이런 일을 상상하면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찌꺼기들이 다 쓸려나가요.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할렐루야! 얼굴에 광채가 나요. 그래서 항상 우리의 생각이 위를 향하고 항상 주님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짧은 이 한생 살면서 영원한 나라에 가서 얼굴 떳떳하게 들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내가 바로 살다가 갈까? 하는 이런 거룩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얼굴에 광채가 나고, 내 안에는 정말 바로 살아야 되겠다는 강한 힘이 솟아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난하든 부하든, 내가 성공했든 실패했든 어떤 환경에 내가 처하든 간에 내 생각이 항상 위를 향하고 주님 중심으로 내 마음이 달려갈 때에는 그 모든 여건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며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내 자신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것이 다른 거에요. 달라요. 오늘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사고가 주님에게 가 있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때문에 내 얼굴이 광채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은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항상 주님 모시고 주님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그 어려운 형편도 찬송하고 감사하면서 극복하고 나가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감동을 받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연인입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입니까? 아니면 연인입니까? 대답하세요. 

연인입니다. 

 

연인이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야되요. 

그 분에게 내 마음의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드리는 세레나데를 한 번 불러야되요. 

 

제가 선택한 찬양 여러분이 잘 아는 찬양인데 가사를 일단 한 번 보세요. 정말로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생각하며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의 찬양입니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예수님을 이야기하는거죠?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이것이 정말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십자가의 연인이 되어 주님을 따라가며 그를 위해 살고자하는 사람의 찬양이에요. 고백이에요.